사진으로 보는 서유럽(이탈리아 폼페이, 쏘렌토)8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먼 항해끝에 뭍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들 신전에서 신께 감사를 먼저 드린다(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과 그뒤 먼산이 베수비오 화산이다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것이 무었인고 하니...그시기다
먼바다를 항해하고 돌아온 뱃사람들이 먼저 신전에서 기도하고 사창가를 찾아가기에 그시기로 사창가를 표시한것이다
거참~~!
폼페이 마켓거리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자연의 재해의 무서움......믿기지 않는 문명화...그시절을 떠올려 본다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가이드가 공연장에서 멋있게 한곡 뽑는다
작열하는 이탈리아의 태양으로 부터 잠시 쉬어갈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우산소나무
공동묘지
말로만 듣던 이탈리아 파스타
화덕에서 갇구운 피자
폼페이 기차역
쏘렌토 항구에서
그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한 지중해 푸른빛 너머로 기독교도와 이슬람 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아련히 스쳐지나간다
그옛날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였던 쏘렌토.....그 흔적은 찾아볼수 없이 최고의 휴양지로 변하였다
비상하는 갈메기 한마리....이 사진 한장으로 쏘렌토를 알수 있을듯 하다
기나긴 초중고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가는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떠난 여행
이번 여행이 아이가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길 빌어본다
"돌아오라 쏘렌토여" 카프리 섬으로 향하는 뱃전에서